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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3가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좌포도청과 광화문역 근처의 우포도청과 전옥서는 한국 천주교회사의 103위 성인 중 24위, 2014년에 시복되신 복자 124위 중 5위. 하느님의 종 133위 중 24위가 신앙을 증거하고 온갖 고문을 당하다가 순교하신 순교 터입니다.

서울의 좌·우포도청은 1784년 겨울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부터 그 본연의 업무(유언비어 유포자 및 掛書 단속) 때문에 천주교 박해와 밀접히 연관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포도청이 천주교 박해와 직접 연관된 것은 1795년(을묘년)의 북산사건(北山事件) 즉 좌포도청(좌포도대장 : 趙圭鎭)에서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체포하려다 실패한 사건 때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신부댁 주인 최인길(마티아), 밀사 윤유일(바오로)와 지황(사바) 등 3명이 체포되어 좌포도청에서 모진 매를 맞고 순교했으니, 이것이 곧 을묘박해(乙卯迫害)입니다. 천주교 순교사는 이처럼 좌포도청에서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 북산사건 : 북산(즉 북악산) 아래의 계동에 숨어 지내던 중국인 주문모의 거처가 밀고되자, 포도청에서 포교와 포졸들을 계동으로 급파했으나 지도층 신자들의 기지로 실패한 사건.

을묘박해로부터 6년이 지난 1801년에는 신유박해(辛酉迫害)가 발생하였습니다. 박해령이 내려지자 조정에서는 양 포도청에 명하여 서울과 경기도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도록 하였습니다. 체포된 사람들 중에서 지도층 신자들은 형조와 의금부로 압송되었고, 남은 신자들 대부분은 좌·우포도청으로 끌려가 모진 문초와 형벌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주문모(야고보) 신부도 자수한 뒤 포도청에서 문초를 받고 의금부로 이송되어 군문효수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 와중에서‘복자’심아기(바르바라)와 김이우(바르나바), 그리고 박중환과 조신행은 포도청의 매질 아래서 순교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포도청은 신유박해 순교자들의 순교 터요 신앙 증거 터가 되었습니다.

이후로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는 일은 좌·우포도청의 중요한 임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가거나 비밀 신앙 공동체인 교우촌으로 피신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한동안 아무런 소득도 얻을 수 없었고, 시간이 지나자 진이 빠져 신자들을 체포하는 일을 포기하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832년에는 밀사 황석지(베드로)가 아현에서 체포되어 좌포도청과 형조에서 형벌을 받은 뒤 1833년 좌포도청에서 병사로 순교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는 다시 한번 많은 신자들이 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하거나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성 앵베르(범 라우렌시오) 주교, 성 모방(나 베드로) 신부, 성 샤스탕(정 야고보) 신부를 비롯하여 성 정하상(바오로), 성 유진길(아우구스티노) 등은 포도청의 모진 형벌을 이겨내야만 하였습니다. 특히 성 정국보(프로타시오), 성 장성집(요셉), 성 최경환(프란치스코) 등은 포도청의 매질 아래서 순교의 영광을 얻었고, 13세의 어린 성인 유대철(베드로), 성 민극가(스테파노), 성 정화경(안드레아) 등은 포도청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성녀 김 바르바라, 성녀 이 바르바라 등과 같이 포도청의 형벌과 열악한 옥중 생활로 병사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좌·우포도청은 이후 박해가 있을 때마다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 증거 터요 순교 터가 되었습니다. 1841년에는 [기해일기]를 저술한 최영수(필립보)가 우포도청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1846년의 병오박해(丙午迫害) 때는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성 남경문(베드로), 성 임치백(요셉) 등이 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하였고, 1866년의 병인박해 때는 성 베르뇌(장경일 시메온) 주교, 성 다블뤼(안돈이 안토니오) 주교 등 프랑스 선교사들, 성 황석두(루카) 회장, 성 장주기(요셉) 회장 등이 포도청의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의 진리를 설파하였습니다. 1868년에서 1871년 사이에는 이유일(안토니오), 한용호(베네딕토), 최사관(예로니모) 등이 좌포도청에서 순교하였습니다.

포도청에서의 순교사는 이렇게 막을 내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1873년에 흥선대원군이 하야하면서 공식적인 박해가 끝난 뒤에도 포도청의 순교사는 계속되었습니다. 1878년에 제6대 조선교구장 리델(이복명 펠릭스) 주교가, 1879년에 드게트(최동진 빅토르) 신부가 체포되어 중국으로 추방되던 시기에 천주교 신자들이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 이병교(레오), 김덕빈(바오로), 이용헌(이시도르) 등은 1879년(기묘년) 좌포도청에서 아사로 순교하였으니, 이들이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이었습니다.

교회 순교록과 관변 기록을 종합하면, 1866년 병인박해 때부터 1879년 기묘박해 때까지 14년간 순교자는 대략 1600~1700명에 이르는데, 이 중 서울 지역 순교자는 약 576명으로 추산되며, 576명 중 순교 장소를 알 수 있는 순교자 149명 가운데 106명(71.14%)은 포도청에서 순교한 것으로 확인되어 포도청은 서울의 최대 순교 터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신앙 증거'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포도청에서만 성인 68위, 복자가 31위, 하느님의 종 18위 등 총 122위가 신앙을 증거 했던 곳입니다. 그러므로 "포도청은 한국 천주교 최대의 신앙 증거터"이기도 합니다. 순교자들은 좌포도청과 우포도청을 거쳐 서소문 밖 형장은 물론 당고개와 새남터, 절두산, 그리고 각 지방 형장에서 순교의 영광을 얻으셨으며, 이 과정에서 포도청은 순교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포도청은 이처럼 많은 신자들이 신앙의 증인으로서 목숨을 바친‘증거 터’이자‘순교 터’였지만, 오랫동안 교회사의 뒤안길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포도청은 2013년 2월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이 종로성당을 ‘포도청 순례지 성당’으로 지정하면서부터 새롭게 조명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종로본당은 같은 해 9월 성당 지하1층에 66.12㎡(20평) 규모‘포도청(옥터) 순교자 현양관’을 개관했습니다. 103위 성인 중 24위, 124위 중 5위, 2차 시복 대상자로 선정된 하느님의 종 133위 중 24위가 순교한 순교 터 포도청이 이제야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서울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탄생한 포도청은 서울대교구는 물론 한국 천주교회에서 길이 보존하고 순교사적 의미를 후손들에게 꼭 알려야 할 중요한 순교 터이자 신앙 증거 터입니다.

(참고 : 조선후기의 포도청과 천주교 순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