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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5년(을묘년) 5월,‘북산사건’이 발생하였다. 조정에서 좌포도대장 조규진에게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체포하라고 명했으나 신자들의 기지로 실패한 사건이었다.
대신 포교들은 밀사 윤유일(바오로)과 지황(사바), 신부댁 주인 최인길(마티아) 등 3명을 체포하여 좌포도청으로 압송하였고, 그들은 조정의 명에 따라 혹독한 매질 아래 목숨을 바쳐야만 하였다. ‘비밀리에 때려 죽여 입막음을 하라’는 명이 내려졌던 것이니, 이를 을묘박해라고 부른다. 순교 직전에 우리의 용감한 순교자들은 이렇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저 십자 형틀에 묶이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가 대신 죄를 지고 가셨으니, 어찌 자식이 되어서 저 큰 부모를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저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그러니 그분을 모독할지언정 천 만 번 죽는 게 더 낫습니다.”
 
아! 매질로 온몸이 너덜너덜해지면서도 십자가의 영광을 부인하지 않은 거룩한 순교자.
위대하다는 말로 어찌 그 용덕을 대신할 수 있으랴!
순명이라는 단어로 어찌 그 신앙의 순수함을 설명할 수 있으랴!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열세 살의 나이로 순교의 영광을 얻은 소년 유대철(베드로) 성인. 유진길(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맏아들. 집안의 온갖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의 뒤를 따른 하느님의 아들.
 
증거자들의 꿋꿋한 용기를 보면서 순교 원의가 불타오른 소년 유대철은 스스로 포도청을 찾았다. 이어지는 혹독한 형벌. 너덜거리는 살점들. 사방으로 튀는 핏방울. 그러나 박해자들은 결코 은총의 힘을 얻은 어린 소년을 다스릴 수 없었다. 포졸이 구리 대통으로 허벅지 살점을 떼어냈으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더욱 단호하였다.“어떠한 형벌로 다스린다 해도 천주교를 믿는 제 마음은 한결같습니다. 믿음을 버릴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포졸이 시뻘건 숯덩이를 집게로 꺼내 성인의 입에 갖다 대며 말하였다.

“네가 천주교를 끝까지 믿는다면 입을 벌려라.”
“그래요. 그 숯덩이를 제 입에 넣어보세요. 제 마음이 변할 줄 아세요.”

작은 천사의 용기는 흉악한 박해자들의 손길을 뛰어넘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세상의 이목이 두려워 이 어린 천사를 형장으로 끌고 가지 못하고 포도청의 옥에서 교살하고 말았으니, 때는 1839년 10월 31일(음력 9월 25일)이었다.

 
 
포도청에서의 형벌은 법으로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법 이외의 형 즉 남형(濫刑)이 자주 적용되곤 하였다.
곤장은 기본이었고, 도적들에게 사용하던 치도곤, 주장질, 팔 다리를 부러트리는 주리질(주뢰질)도 행해졌다. 톱질로 살점을 떼어내고, 장대에 거꾸로 잡아맨 뒤 등나무 줄기로 때리는 학춤도 자행되었다.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은 주리질과 주장질에 이어 치도곤 110대, 주장과 채장 합 340대를 맞고도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형리들조차 놀라 소리쳤다. “저놈의 몸은 육신이 아니라 목석이다.” 그렇게 성인은 옥중에서 장독으로 순교하였다.
프랑스 선교사 앵베르(범 라우렌시오) 성인 주교, 모방(나 베드로) 성인 신부, 샤스탕(정 야고보) 성인 신부도 좌포도청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고, 정하상(바오로) 성인도 좌포도청의 혹독한 형벌 아래서 신앙을 굳게 증거하였다. 1866년의 병인박해 때는 베르뇌(장 시메온) 주교와 다블뤼(안 안토니오) 주교가 포도청의 형벌을 견디어내야만 하였다. 황석두(루카) 성인은 포도대장의 추상과 같은 문초에도 아랑곳없이 외쳤다.
 
“천주는 큰 임금이요 큰 아비입니다. 포청의 칼과 톱이 무섭다고는 하나 어찌 불충·불효하겠습니까?”
 
박해자들은 손쉬운 교수형으로 순교자들의 목숨을 빼앗곤 하였다. 포졸이 순교자의 목을 맨 올가미 줄 끝을 구멍으로 내보내고 방문을 나오면, 다른 포졸들이 달려들어 닻을 끌어올리듯 줄 끝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묵직한 나무토막에 묶어 숨을 끊어버렸다.
1879년의 기묘박해 때는 한 톨의 낱알도 아까운 듯 순교자들을 굶겨죽이기까지 하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뒤 중국으로 추방된 드게트(최 빅토르) 신부는 이렇게 회고하였다.
 
“순교자들은 굶주림으로 희생되었습니다. 얼마나 참혹한 광경이었는지? 나는 기겁하여 물러섰습니다. 그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었고, 비참과 기아, 그리고 무서운 문둥병 같은 것으로 완전히 변해 버린 산송장들이요, 진짜 해골들이었습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 최양업 토마스여 잘있게. 천당에서 다시 만나세.
나의 어머니 고 우르술라를 특별히 그대에게 부탁하네.
저는 그리스도의 권능을 굳게 믿습니다. 그분의 이름 때문에 그분을 위해 묶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혹독한 형벌을 끝까지 용감하게 이겨내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의 환난을 굽어보소서.
주님께서 만일 우리의 죄악을 살피신다면, 과연 누가 감히 당할 수 있으리이까.”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포도청 옥에 갇혀 스승 신부님들께 올린 옥중 서한의 일부이다. 이로부터 한 달 반 뒤인 1846년 9월 16일에 김대건 신부는 새남터로 끌려나가 군문효수형을 받아야만 하였다.
 
포도청은 김대건 신부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신앙을 증거하고, 마지막 밤을 보낸 곳이다. 그 후미지고 더러운 골방에서 그는 끝까지 신앙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끝까지 자신의 손을 잡아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묶인 것이 그에게는 더없는 은총이었다.